Monday, May 28, 2007

영화 밀양

영화 밀양을 보면서 왜 이 영화가 Canne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을까하는 의구심이 계속 일어났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여러 어려움중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게 되는 아픔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표현력때문일까, 같지만 다른 인간의 반응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기심때문일까...

아직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래서 전도연의 여우주연상수상에 전적인 박수를 못보내고 있지만 밀양은 나에게 상당한 긴장을 주는 영화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물론 신애가 아픔을 치유받는 곳이 교회이고 그를 계속 돌보는 이웃들이 교회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발(최은 교수의 말)을 표출하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후배들과 밀양에 관한 얘기를 하면서 용서의 신적 특성과 사랑의 행위적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결과적으로 말한 나도 이해하기 힘든 꼬인 구조가 되어 버렸다. 소설과 영화모두에서 나온다는 그 대사 "주님이 이미 용서하신 그를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며 울분을 터뜨리는 신애의 박탈감은 신에대한 우리의 태도를 꼬집는 일침으로 다가왔다. 결국 모든 영역의 주되심을 인정한다는 말의 진위는 행동의 구체성으로 증명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행동은 생각의 산물이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일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출발하게 된다.

신애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마치 8복의 한구절을 보는 것 같다. 뉴스엔죠이의 한 독자가 쓴 답글에서 용서의 상호성을 발견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 18,18)는 말씀으로 비추어보면 신애의 아들을 죽인 납치범이 말한 그 용서는 신애가 다가갈 길을 차단한 폐쇄적인 용서로 끝을 맺고 있다. 이것으로 신애의 진짜 괴로움이 시작된다. 사실 이 내용은 내가 영화를 보면서 풀지 못한 숙제였는데 정인규라는 독자의 답글이 상당부분 해갈을 시켜줬다.

영화제목인 밀양은 sectret sunshine으로 비밀의 빛이라는 풀이로 쓰이고 있다. 공개된 비밀이라는 하나님의 나라(통치)를 설명하는 또다른 이름인 것 처럼...